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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writer) 홈관리자
ㆍ작성일(date) 2014/06/03 (화)
 
기본교리-연기법,12연기, 중도

4. 연기법-십이연기(十二緣起)

 

연기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緣起)의 도리로써 대표된다.

 
연기는 ‘말미암아 일어난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의지하여, 또는 여러가지 조건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즉 일체의 것은 모두가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며, 또한 그 조건만 없어지면 그 존재도 있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간접의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緣)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로, 이를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는 술어로 나타내기도 한다.

상의상관성에 관한 『잡아함경』 권15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此滅故彼滅].”

이것과 저것이라는 말은 단순한 두 가지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상의성(相依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모든 만유(萬有)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하나도 독립됨이 없이 서로 서로가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다는 결론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 속에는 우연히, 홀연하게 또는 조건없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다른 것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남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존재인 절대자적 유일신(唯一神)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의 원리로 구성되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연기의 법칙은 전변설(轉變說)과 적취설(積聚說)의 치우친 존재론을 깨뜨리고[破邪]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한 구원의 논리로서 제시된 것이니, 즉 우주에는 일체 삼라만상을 전변해내는 어떤 선험적(先驗的)인 존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요소적인 원인의 적취(積聚)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諸法]은 서로 연관되어 동시에 일어난 것이라는 뜻이다[相依相資 同時生起].

그러므로 주관(主觀:六根)과 객관(客觀:六境)은 독립된 자성(自性:獨自的 存在性)이 없이 서로 무한한 흐름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니, 객관과의 관련 속에서 반응하는 주관의 행위[業]가 모든 창조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써 우주 창조의 중심이 초월적 신이 아니라 인간의 편, 살아 있는 존재의 편임을 해명하였다. 다시 부처님은 존재 그 자체의 허구성[諸法無我]을 설하시어 삶의 무한한 해방된 공간[空]을 깨우쳐 주시어 해탈의 길을 제시하였다.

연기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영원[無生]과 변화[生]를 동시에 사는 자이며, 절대[空]와 상대[有]를 동시에 경험하는 자인 것이다.
 
또한 인간은 집착과 미망으로 인하여 고난과 속박의 삶에로 전락[流轉緣起]되어지기도 하며, 다시 집착과 미망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삶의 현재 속에 구현[還滅緣起]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은 논리이다.

이러한 연기법은 부처님이나 혹은 다른 어느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우주 법계에 항상 머무는[法界常住] 법이라고 하였다. 또한 부처님은 연기의 뜻을 깨달아 공(空)을 체득하는 것만이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도에 나아가는 것이며, 진정한 자아의 회복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십이연기(十二緣起)

십이연기는 십이인연(十二因緣), 십이지연(十二支緣), 십이인연기(十二因緣起), 십이인생(十二因生), 십이연문(十二緣門) 등등으로 불려진다.

 
곧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대한 혼미(迷)의 인과를 12로 나눈 것이며, 근본 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교의의 하나이다. 원래 아함경전에 설해진 십이연기는 불교 근본 교설 중 가장 조직적으로 설명된 교설이다. 그것은 만유가 인연에 의해 생성·소멸(生成消滅)되는 실상을 상세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12연기는 연기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중생의 괴로운 현실상(現實相)인 모든 고뇌를 떠나기 위해 그 발생과 소멸을 추구하여 12단계를 거쳐 그 결론을 얻은 것으로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까지이다. 불교에서는 제법의 실상(諸法實相:모든 것의 참다운 모습)에 대한 알음을 지혜[智慧般若]라고 부른다. 특히 존재의 법칙성[三法印, 因果의 도리, 相依相關性等]에 대한 깨달음을 ‘명(明, Vidya)’이라는 말로 부른다.

이 명과 모순되는 개념을 ‘무명(無明)’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무명이 사람에게 있게 되면 이것은 연(緣)하여 행(行)이 있게 되고,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게 되고, 식은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게 되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게 되고, 육처를 연하여 촉(觸)이 있게 되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게 되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게 되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게 되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게 되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게 되고, 생을 연하여 노(老)·사(死)·우(憂)·비(悲)·고(苦)·뇌(惱)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하나의 괴로운 온(蘊)의 집(集:發生)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잡아함경 15권>

결국 명(明)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죽음이 있게 되는 형성 과정을 열두 단계로 자세하게 분석하여 보여 주는 것이 12연기설인 것이다. 12支 그 각각의 뜻은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 : 명(明)이 아닌 것[非明] 또는 명이 없는 것[無明]의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실재(實在) 아닌 것 또는 실재성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實體)로 착각한 망상(妄想)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참된 나라고 집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이며 맹목적 생존욕과 생식욕을 지닌 본능적인 생명력으로 ‘생의 의지’로 표현된다.

 

행(行) : 무명이 있으면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행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행은 ‘결합하는 Sam 작용 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듯이 무명에 의하여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實在化)하려는 작용이라 하겠다. 맹목적 생의 의지인 무명은 그 무엇을 욕구하고 만족시키고자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이다. 이를 형성 작용(形成作用)이라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며 서구에서는 ‘impulse’로 번역함이 보통이다.


식(識) :행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이 발생한다고 한다. 식은 식별(識別)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개체가 형성되자 그곳에 분별하는 인식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색(名色) :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일어나는데,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名)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육입(六入) : 육처(六處)라고도 하며 명색을 연하여 육입이 일어나는데, 육입은 인간 실존의 근저를 이루는 여섯 개의 감각 기관(眼, 耳, 鼻, 舌, 身, 意-六根)을 말한다.


촉(觸) : 육입을 연하여 촉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한다, 충돌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여섯 개의 감각 기관(六根)이 그 대상(六境:色, 聲, 香, 味, 觸, 法)과 접촉하는 것과 육근(六根)과 육식(六識:눈, 귀, 코, 혀, 몸, 의지에 발생한 식)이 화합(和合)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촉은 단순한 접촉이나 자극이 아니라 인식성립(認識成立)의 원초적 형태이며, 인식론적 경험의 현실을 나타낸 것이다.


수(受) : 촉을 연하여 수가 발생한다.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不苦不樂] 중간 느낌[捨受]의 3가지 종류가 있다. 이를 고, 락, 사 삼수(三受)라고 한다. 접촉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 하겠다.


애(愛) : 수를 연하여 애가 발생한다. 애욕(愛慾), 갈애(渴愛)를 뜻한다. 위의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애(愛)를 번뇌 중의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수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한다. 무명은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이다.


취(取) : 애를 연하여 일어나는 취는 취득하여 병합(倂合)하는 작용이다.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유(有) : 취를 연하여 유가 발생한다. ‘유’라는 말은 ‘있다(be)’와 ‘되다(become)’의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나고죽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 하겠다. 유에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유(三有)가 있다. 삼계는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생(生) : 유에 연하여 생이 발생하는데, 생은 문자 그대로 태어난다는 뜻으로 유(有)가 그렇게 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을 뜻한다면 그것에 연하여 생이 있게 될 것은 물론이다.


노사(老死) : 생이 있으므로 노, 사, 우, 비, 고, 뇌(老死憂悲苦惱)가 있게 된다. 생의 현실은 마침내 늙어 죽음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12연기의 설명에서 볼 때,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을 멸해 없앰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또한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 부른다. 무명의 멸(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 한다.


이 12연기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죽음을 비롯한 모든 고통이 바로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죽음이 신(神)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 자신은 얼마나 막막한 절망에서 헤매게 될까.

그러나 석존은 각고(刻苦)의 오랜 구도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밝게 아셨다. 세계의 어떤 종교가 석존의 이러한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주고 있을까. 연기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석존뿐만 아니라 비바시불을 비롯한 과거에 출현했던 여러 부처님들도 모두가 보리수 아래서 12연기를 순(順)·역(逆)으로 관찰하여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중도(中道)의 진리

우리는 연기의 도리에서 일체 삼라만상은 무상하고 무아(無我)한 것이므로 실로 있다든지 항상된다든지 할 아무런 것도 없고 모든 현상계 제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상의성(相依性)관계에 있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무아이고 무상이라고 제법이 ‘무(無)’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인연으로 결합된 모든 것은 각기 그 인연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잡아함경』 권10에 보면 이런 의문을 제기한 제자가 있었다.
‘일체 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문을 일으켰던 챤냐 비구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펴신다.


“세상 사람들은 혹은 있다, 혹은 없다라는 두 극단에 의해서 미혹(迷惑)된다. 세간의 모임을 참다이 바로 관찰하면 세간은 없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세간의 멸함을 여실히 관찰하면 세간은 있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말한다.”

세간(世間)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그저 없다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전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실재성(實在性)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에서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滅)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불교가 독창적으로 주장하는 무아설(無我說)의 높은 뜻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챤냐 비구가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妄我, 假我]’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교설이라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12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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